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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꽃 이야기

현란하게 핀 백화의 왕 < 모란 >

by 무님 202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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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9일 오늘의 꽃은 < 모란 >이다.

모란은 목단()이라고도 한다. 높이 2m이며 각처에서 재배하고 있다. 가지는 굵고 털이 없다. 잎은 3겹으로 되어 있고 작은 잎은 달걀모양이며 2∼5개로 갈라진다. 잎 표면은 털이 없고 뒷면은 잔털이 있으며 흔히 흰빛이 돈다.
꽃은 양성으로 5월에 홍색으로 피고 지름 15cm 이상이며 꽃턱이 주머니처럼 되어 씨방을 둘러싼다. 꽃받침조각은 5개이고 꽃잎은 8개 이상이며 크기와 형태가 같지 않고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으로서 가장자리에 불규칙하게 깊이 패어 있는 모양이 있다.
수술은 많고 암술은 2∼6개로서 털이 있다. 열매는 9월에 익고 내봉선()에서 터져 종자가 나오며, 종자는 둥글고 흑색이다. 많은 재배품종이 있으며 뿌리껍질을 소염·두통·요통·건위·지혈 등에 쓴다.
모란을 심는 적기는 10월 상순∼11월 상순이며 토양은 메마르지 않은 양토()가 적당하다. 번식은 실생(포기나누기·접붙이기의 3가지 방법이 있다. 모란의 종류는 발달 과정에 따라 중국종·일본종·프랑스종의 3계통으로 구분하고, 개화기에 따라 보통종과 겨울모란으로 나눈다. 꽃말은 ‘부귀’이다.

 

 

 

 

모란의 꽃말은 < 부귀, 영화, 성실 >이라고 한다.

모란을 보면 김영랑님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도 생각나고, 향기가 없는 꽃이라 말했던 선덕여왕도 생각난다. 그러나 실제로 모란은 양귀비에 비유될 정도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향기 또한 매우 은은하다. 재배품종들이 많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뿌리를 약용으로 쓰려고 재배하고 있다. 요즘은 꽃 요리에 이용되기도 한다. 풍성하고 매력적인 꽃이 부귀를 상징하므로 고풍스러운 정원에 잘 어울린다. 추위에 견디는 힘이 강해 어디서든 잘 자라지만 건조한 곳은 좋지 않다. 번식은 이른 봄이나 가을에 씨앗을 뿌려 묘로 양성하거나 가을에 눈 2-3개씩 붙여 포기나누기 해 준다.

중국원산이며 모란과의 낙엽성 관목이다. 흔히 작약과 모란(목단피라고 함)이 같은 속의 식물이고 모양도 비슷해 혼동하기 쉬운데, 작약은 초본성이지만 모란은 목본성인 점이 크게 다르다. 모란은 키가 2m정도까지 자라며 꽃은 5월에 피는데 꽃의 지름이 15cm이상으로 작약보다 큰 편이다. 열매가 9월에 익는데 익은 후 터져 둥글고 검은 작은 종자들이 나온다.

 

 

 

 

모란의 전설

 

1. 설총의 〈화왕계〉

신라 신문왕이 설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부탁하자 〈화왕계()〉를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좋은 봄날에 현란하게 핀 백화의 왕 모란이 수많은 꽃 위에 군림하자 천자만홍()의 꽃들이 다투어 화왕의 궁궐에 입조할 때 요염한 절세미인 장미가 아양을 떨며 화왕에게 말하기를 "첩이 일찍 왕의 염덕()을 듣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찾아 왔으니 행여 버리지 않으시면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또 포의한사()로서 길가에 있던 할미꽃()이 구부리고 와서 화왕에게 그 곁에 있으면서 일하기를 원하며 요염한 여자에게 현혹되지 말기를 간하였다.
그러나 화왕은 벌써 요염한 장미에게 빠져서 할미꽃의 충언을 알면서도 그것을 듣지 않았다. 그것을 본 할미꽃은 분연히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는 왕이 총민함이 의리를 깨달으리라 믿었으나 가까이서 보니 그렇지 못하외다. 예로부터 임금이 요염한 여인을 가까이하게 되면 충직을 소원하게 하여 마침내 패망을 부르지 않은 적이 드뭅니다. 서시(西) 같은 요희()가 나라를 뒤집고 맹가() 같은 현인이 뜻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인즉 신인들 어찌 하리까" 하고 왕에게서 떠나려 하자 왕도 그제서야 깨닫고 할미꽃에게 사과하였다.

이야기가 끝나자 신문왕은 낯빛이 변하여 가로되 "뜻이 깊은 이야기로서 왕자의 계()가 될 만하니 곧 글을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한다. '

 

이것이 이른바 오늘날까지도 인구에 회자하는 〈화왕계〉라는 것이다.

 

 

 

 

모란도

2. 모란과 선덕여왕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선덕여왕의 공주시절 일화가 전한다.

 

'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선덕여왕이 "꽃은 비록 고우나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 본즉 과연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의 영민함을 모두가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은 선덕여왕이 배우자가 없음을 당 태종이 조롱한 것이라 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은 모란 그림에 벌·나비가 없는 것은 모란꽃이 향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시에 있어서도 간혹 모란에는 향기가 없음을 읊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선덕여왕의 〈모란도〉에 관한 일화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란꽃에는 분명히 향기가 있고 벌·나비도 날아든다. 당나라 위장()은 백모란을 읊은 시에서 "뜰에 들어서자 그윽한 향기 풍겨오네()"라고 하여 모란의 향기를 상찬하고 있다. 또 고려시대 이인로()는 〈미개모란()〉이란 시에서 "봄 추위가 동산에 꽃 피는 것을 억제하니() 춤추는 나비와 노니는 벌이 그리워한들 무엇하리()"라고 하여 모란꽃에도 벌·나비가 날아들 수 있음을 읊고 있다. 그리고 시에서는 일반적으로 매화의 향기를 암향()이라 하고 난초의 향기를 유향()이라고 한 데 대해 모란의 향기는 이향()이라고 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모란꽃에는 분명히 향기가 있으나 다만 꿀벌이 오지 않는 것은 냄새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하고 물리학에 밝은 사람이 한번 상고해 볼 만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지은 영봉시()에서 곱게 핀 모란꽃에 벌이 가지 않는 것은 부귀화라는 이름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읊고 있다.

그러면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도〉에는 왜 벌·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았을까?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모란꽃에는 나비를 같이 그리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것은 모란 그림에 나비를 그려 넣게 되면 모란꽃은 부귀를 뜻하고 나비는 질수(, 80세)를 뜻하기 때문에 부귀질수, 즉 80세가 되도록 부귀를 누리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즉 나비를 그려 넣는 것이 오히려 영원히 부귀를 누리라는 의미를 제한하는 것으로 되어 그리지 않는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선덕여왕은 아마 이러한 독화법()의 원리를 몰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모란의 씨를 심었더니 정말 향기가 없더라는 말은 호사가들이 꾸며낸 말일 수도 있다. 또는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기 위한 육종과정에서 꽃은 크고 색깔은 화려하면서도 향기까지 좋은 것은 배합하지 못해서 향기없는 꽃이 핀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3. 이시백과 모란

 

' 조선 효종 때에 정승 이시백()의 집에 아름다운 모란꽃 나무가 있었는데 마침 꽃이 활짝 피었다. 효종이 이 말을 듣고 중환()을 보내어 이를 구하시니 시백이 정색하여 말하였다.
"내가 비록 어질지 못하나 일국의 정승이 되어 임금님을 보필하는 책임을 졌으니 어찌 이목()의 완호()하는 물건으로 임금을 섬기리오."
그러고는 즉시 뜰 아래 내려가 모란을 베어 버리고나서 북향재배하고 아뢰었다.
"신이 정도로써 전하를 섬기지 못한 고로 오늘에 이르러 전하께옵서 신으로 하여금 바르지 아니함을 행하게 하시니 만일 이와 같을진대 장차 뇌물이 성하여 국가의 위태함이 조석에 있을지라, 신이 보필하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는 죽어도 마땅하오나 이는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중환이 돌아와서 이러한 사실을 자세히 고하니 효종이 듣고 대단히 기뻐하고 그후로 시백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국정에 힘썼다고 한다. '

이 이야기는 《대동기문()》에 실려 있는데 교훈적이라 하여 구한말의 교과서에도 실렸다. 《해동속소학()》에서는 이시백의 정원에 있던 그 모란은 중국에서 건너온 금사낙양홍()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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